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정착 한 이후 그의 후손들이 유대 민족으로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그들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430년간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 그들을 탈출 시키실 때에도 홍해를 갈라 마른땅으로 건너게 하신 권능의 하나님이셨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40년 광야의 여정 동안에도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신 놀라운 능력자이셨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감히 그 명령을 거역할 수 없는 전능자셨다. 하지만 그 엄청난 그 신성으로 인해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자가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그들과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바로 예언적 다윗이다.
[기독교의 태동. 유대교의 변화] 사람의 모습 – 예언적 다윗으로 오실 것에 대한 예언
출 20:18~19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신 18:15~1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에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 찌니라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산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데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어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하지만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너무나 먼 훗날에 등장할 구원자였다. 그들은 광야 생활을 하는 기간 뿐 아니라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 끊임없이 그들을 이끌어 줄 선지자를 원했다. 급기야 하나님께 자신들을 통치할 왕을 세워달라는 요구를 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셨다. 하지만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왕의 통치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왕 시대이후에 유대나라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분열이 되었다. 이후 북 이스라엘은 주전 721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였고 586년에는 남 유다도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여 70년간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이런 격동의 시간들을 지내며 몇몇 깨어있는 선지자들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자들은 없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이 변함없다는 것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 ‘다윗’이라는 역사적 실존 인물을 통해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 오실 ‘그리스도(구원자)’를 구체적으로 예언 하셨다.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겔 34:23~24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해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찌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서 잘찌라
호 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오랜 기다림- 흔들리는 믿음) 바벨론 유수이후 유대 사회의 변화
그러나, 70년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바벨론에서 해방을 맞은 유대민족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지킬 것을 굳게 다짐하며 그들을 구원해줄 ‘다윗’을 기다리겠노라고 결의했던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이유인 즉 유대인들에게 호의적 이었던 페르시아가 헬라에 의해 멸망을 당하며 유대민족은 헬라의 왕들에 의해 심한 박해를 받는 입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을 이런 압제에서 구원해줄 ‘구원자’를 기다려야 하는 기약 없는 기다림이 다시 시작된 것이었는데, 바벨론 유수이후의 시대상은 이전과는 달리 ‘예언적 다윗’을 기다리는 믿음을 흔들어 놓는 환경들이 많이 제공되었다.
다시 말해, 헬라(그리스)와 로마의 지배를 차례로 받게 되면서 ‘인간 중심적’이고 ‘세속적’이면서도 ‘합리성’을 추구하던 이방의 문화가 들어와서 유대사회에 자리 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믿어왔던 유대인들(신본주의)에게 이방의 문화(인본주의적 개념과 철학)는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생활과 사고방식을 알려주는 신세계의 문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런 시간들 속에 유대인들은 자신을 구원해 줄 ‘예언적 다윗’에 대한 간절함도 점차 흐려졌다. 대신 소피스트처럼 이성과 논리로 토론하는 문화를 만들어 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판단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리스 식 학교가 예루살렘을 비롯한 동방 여러 곳에 세워지며 유대인들은 소피스트처럼 이성과 논리로 토론하는 문화를 만들어 내었는데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기원전 2세기 이후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유일신인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여러 종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 중 ‘바리세파’는 토라를 배우는 토론학원을 열어 성경의 주요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이는 문화까지 만들어 내었다. 그들은 이제 ‘예언과 영성의 시대’는 중단되었다고 생각하며 그 빈자리를 ‘이성과 토론’으로 채우고자 하였다(그리스도교의 탄생. 정기문 지음. p203).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당시 유대사회는 구원자로 오시는 ‘예언적 다윗’을 찾고 구하기보다는 서로 자신의 성경 해석이 옳다고 주장하는 ‘바리세파’와 ‘사두개인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상황 이었고, 그 외에도 헬레니즘이 가져온 합리적인 사유와 토론 문화를 향유하며 많은 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펼쳤기에 에세네파와 금욕주의와 같은 파들이 24개나 등장하여 신앙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 ‘예언적 다윗’을 찾지 않는 사람들 ) 유대교
이제 유대인들에게 ‘예언적 다윗’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찾는 일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동방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대인의 왕이 나신 곳을 물었을 때 제사장들은 그저 성경에 있는 예언의 말씀을 들어 ‘베들레헴’에서 나신다고 한 말씀을 전해만 주었지 그들과 함께 가서 ‘유대인의 왕(예언적 다윗 왕) ’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께 경배를 드리지 않은 것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마2:1~6).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지키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일이 더 중요했기에 그들을 구원하실 ‘예언적 다윗’을 찾는 일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율법의 해석에만 집중하였었기에 자신들의 율법 해석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예언적 다윗’으로 오신 예수님과의 분쟁도 서슴지 않았다.
[예언적 다윗으로 오신 하나님] 다윗 왕의 예언을 이루시는 예수님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간의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모든 유대인들의 관심이 ‘예언적 다윗’에게서 아주 멀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아기의 모습(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탄생하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그 때를 기독교의 시작으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역사’는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30세에 ‘영적 기름부음인 침례’를 받으시고 ‘다윗의 (왕)위’에 앉아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예언적 다윗’으로 오신 구원자임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직접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예언’과 ‘성취’를 하나하나 가르치시며 당신이 바로 ’다윗의 예언‘을 모두 이룬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일깨워 주셨다. 예수님을 ‘예언적 다윗’으로 증거 하는 내용은 사복음서 가운데 누가가 기록한 복음서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눅 1:31~32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역하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며 따라 다녔다. 성경의 해석과 말씀공부를 담당하던 바리새인들조차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만 알고 있었으니 백성들의 무지야 말을 해서 무엇 하겠는가. 이에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시’(시110:1)를 인용하여 ‘다윗의 위’에 앉아 오시는 분은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그리스도’시요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일깨워 주셨다.
눅 18:38~39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눅 20:41~44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라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예언적 다윗 왕의 예언1) 30세에 ‘다윗의 왕위’에 오르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다윗의 위’에 앉아 오신 ‘예언적 다윗’이라는 사실을 30세에 받으신 침례를 통해 처음으로 보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든 구원의 사역을 펼칠 수 있으신 하나님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실질적인 구원의 사역을 펼치신 것은 30세에 침례 요한으로부터 ‘영적 기름부음’인 ‘침례’를 받고 난 이후 부터였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30세에 침례를 받으셔야 했을까? 그 이유는 단 하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인물로 선택하신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고 왕위에 오른 나이가 30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언적 다윗’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도 30세가 되기를 기다려서 ‘침례’를 받으시고 ‘예언적 다윗의 왕위’에 오르셨던 것이다.(눅4:16~21)
눅 1: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눅 3: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
눅 3: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예언적 다윗 왕의 예언2) 40년을 통치.
하지만 ‘다윗의 위’에 앉으시는 예언은 30세에 영적 왕위에 오르는 것만으로 완전 성취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윗이 왕위에 앉아 유대나라를 통치했던 40년간의 통치 기간도 예언적 다윗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이루셔야 할 또 다른 예언이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단 3년간의 복음 생애를 마치고 올리우셨다.
삼하 5:4 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 동안 다스렸으되
눅 3:21~23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눅 13:6~9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예언적 다윗 왕의 예언3) ‘새 언약의 절기’ 지키는 ‘영적 시온’을 건설.
그리고, ‘다윗의 위’에 앉으시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이루셔야 할 예언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영적 시온’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육적 다윗이 왕이 되고 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시온 성’을 건설한 것이었다. 다윗의 이런 행적은 장차 등장하실 예언적 다윗이 이룰 예언이 되었다. 이런 예언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제자들에게 ‘새 언약의 절기’를 세워주심으로 ‘절기 지키는 영적 시온’을 건설해 주셨다. 그것은 오직 ‘예언적 다윗’인 예수님께서 오셔야만 이루실 수 있는 예언이었다.
삼하 5:7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사 33:20 우리 절기의 시온 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언적 다윗 왕의 예언4) 목자 다윗 – 당신의 백성을 친히 이끄심.
예수님께서는 ‘다윗 왕’으로서의 예언이 아닌 ‘목자로 오신 다윗’의 예언도 이루셔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가리켜 양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는데 실제로 죄인들의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당신이 ‘목자로 오신 다윗’임을 밝히 증거 하셨다.
삼상 17:34~35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요 10:7~8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요 10:10~ 11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언적 다윗’이 아님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며 예수님의 핏 값을 자신들과 그 자손에게 돌리라고 소리쳤던 그들이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언적 다윗’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이루셔야 할 ‘다윗의 예언’은 육신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육적인 예언’이 아닌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영적인 예언‘이라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초림 하셨던 그 시대에 완전히 이루어 질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예언을 하나하나 이루어 가셨지만 ‘예언적 다윗’으로 오실 것에 대한 관심을 이미 놓아버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다윗이 세운 예루살렘(시온)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모세의 율법조차도 제대로 준행하지 않고 궤변을 늘어놓는 이단일 뿐 이었다. 또한 로마의 압제에서 그들을 구원해주지도 않으면서 ‘유대인의 왕’을 자처하셨기에 신성 모독죄를 적용하여 이구동성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핏 값을 자신과 자손들에게 돌려달라며 엄청난 죄를 범하였다.
[초대 기독교의 부흥] ‘다윗’의 예언 성취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렇다면 예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은 ‘예언적 다윗의 예언’이 영적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영적인 예언’이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초림하셨을 때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다시 말해 구원받아야 할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시는 ‘예언적 다윗’의 예언은 ‘초림’ 뿐만 아니라 ‘재림’이 반드시 있어야 함을 가르침 받았던 것이다.
(예언적 다윗으로 재림하실 예언 1) 다시 받을 침례
예수님께서는 초림 하셔서 30세에 침례를 받으시고 ‘예언적 다윗의 왕위’에 앉으셨다. 그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다시 한 번 더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왜 일까? 이 말씀의 참 뜻은 예수님께서 다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두 번째 오셔야 함을 간접적으로 예언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침례는 일생에 한 번 받는 것인데 ‘또 다시 받을 침례가 있다’는 것은 다시 한 번 더 육신을 입지 않는다면 결코 행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땅에 다시 사람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 다윗의 남은 재위 기간을 이루기 위해 ‘다윗의 위’에 앉기 위해선 초림 때와 마찬가지로 30세에 반드시 ‘영적 기름부음인 침례’를 받으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눅 12: 49~50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예언적 다윗으로 재림하실 예언2) 남은 37년의 복음 사역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초림 하셔서 이스라엘 나라에서 ‘다윗’의 왕위에 앉아 복음의 열매를 구하는 시간이 3년(눅13:6~9)이라는 것을 비유를 통해 알려 주셨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다윗의 왕위’에 앉아 40년을 다스리는 예언이 초림 예수님으로써 완전 성취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제자들은 당시 자신들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께 여쭙기를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때(재림 하실 때) 어떠한 징조가 있을 것인가를 여쭤 보았던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인자(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시는 시기를 정확히 알려 주셨다.
마24: 3 ..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마24: 32~33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예언적 다윗으로 재림하실 예언3) 재건되어질 시온
또한, ‘예언적 다윗’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새 언약의 절기를 통해 건설하셨던 ‘절기 지키는 시온’이 오래지 않아 악한 자들의 훼방에 의해 완전히 무너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셨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세우신 ‘영적 시온’은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곳(사33:20)’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절기가 폐지되어 버린다면 더 이상 ‘영적 시온’도 유지될 수 없으므로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마 13:24~30, 37~43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살후 2: 3~4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단 7:25~26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그러나 심판이 시작된즉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끝까지 멸망할 것이요
이처럼 ‘예언적 다윗’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세우신 ‘영적 시온’이 무너진 상태로 세상 끝 날 까지 간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성경은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는 장소가 바로 ‘시온’이라고 일관되게 가르치고 있다. (시133:3, 롬11:26, 계14:1,3) 그리고 마지막에 구원받을 성도들 또한 ‘시온에 어린양과 함께 섰다‘라고 예언하셨으므로 ‘예언적 다윗’이 세운 ‘절기 지키는 영적 시온’은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에 반드시 재건되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럼 구원의 장소인 ‘영적 시온’은 누가 다시 건설할 수 있을까? 오직 ‘예언적 다윗’으로 오시는 ‘재림 다윗’ 밖에는 없다. 왜냐하면 ‘영적 시온’을 건설하는 사명은 오직 ‘예언적 다윗’에게만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언적 다윗’이 이 땅에 두 번 째 오셔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사항 이다.
뿐만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나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신 마지막 때에 대한 예언도 이 시대 ‘예언적 다윗’이 다시 오셔야만 완전하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51:3, 미4:1~2, 시87:5~6)
(예언적 다윗으로 재림하실 예언4) 마지막에 다시 등장하시는 ‘한 목자’
그리고 양들을 이끄는 목자로 오시는 ‘다윗’에 대한 예언 또한 두 번 째 이 땅에 오셔서 이루어야 할 예언이 포함되어 있다.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겔 34:11~12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겔 37:24~25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 모두에게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수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 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흐리고 캄캄한 날에 양을 찾는 목자로 오신 ‘다윗’은 다름 아닌 ‘재림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초림 때 당신의 양(겔34:31)을 친히 모으셨다. 하지만 목자로 오시는 다윗의 예언은 초림의 예언뿐 아니라 재림하셔서 이루셔야 할 예언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다윗’에 대한 예언을 예수님께 직접 배웠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올리우신 후에 다시 재림하시는 ‘다윗’을 만나는 시간이 그리 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했기에 오순절 이른 비 성령을 받은 120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일에 모든 사력을 다했으며, 하늘로 올리우신 예수님께서 곧 ‘예언적 다윗’의 완전한 예언을 이루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앞장섰던 유대인들에게 회개를 촉구 하였던 것이다. 이런 사도들의 믿음이 초대 기독교의 폭발적인 부흥을 일으키게 되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예언적 다윗’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은 오히려 회개를 촉구하는 초대교회 사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대립] 반목의 시대
(‘예언적 다윗’에 대한 편견과 오해) 유대교에서 바라본 ‘예언적 다윗’의 조건
예수님께서 올리우신 후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 교회를 설립했다. 예수님을 끝까지 ‘예언적 다윗’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 교회를 설립한 것이다.
왜 일까? 이유인 즉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그 시대에 예수님께서 곧 재림하셔서 마지막 사역-예언적 다윗이 이루셔야 할 남은 예언- 을 완수 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탄생. 정기문 지음. p200~201 )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예언적 다윗’의 그 어떤 예언도 이루지 못한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하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여전히 구약의 예언을 묵상하며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예언적 다윗’이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그들이 이런 확신을 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다윗의 위’에 앉아 오시는 분은 그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셔야 한다고 믿었다. (메시아적 사명)
둘째, ‘예언적 다윗’은 훼파된 성전(시온)을 다시 건설해 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셋째, ‘다윗의 위’에 앉기 위해서는 반드시 율례에 따라 기름부음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넷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한다고 믿었다.
다섯째, 다윗은 목자가 양을 우리에 모음과 같이 예루살렘으로 이스라엘 민족들을 모아야 한다고 믿었다.
여섯째, ‘예언적 다윗’이 이 땅에 임하기 전에 선지 엘리야가 불 말과 불 병거를 타고 와서 그의 길을 예비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말4:5)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이 바라본 예수님은 ‘예언적 다윗’으로 오셔서 이루어야 할 일들을 하나도 이루지 못한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들이 그토록 원하고 바라던 로마에서의 해방은커녕 46년에 걸쳐 건축하고 있던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에 의해 온전히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며, 그 때는 성전을 등지고 오히려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까지 말씀하셨다. 민족의 해방은 고사하고 이스라엘 민족들이 이방으로 흩어 질 것을 예언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사장에게 실제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모세의 율법도 온전히 준행치 않아서 가는 곳마다 분쟁을 일으키고 다니는 이단의 앞잡이였다. 또한 ‘예언적 다윗’이 오시기 전에 그의 길을 예비하러 올 것이라던 ‘선지 엘리야’도 하늘에서 내려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기에 ‘엘리야의 사명’으로 온 침례 요한도 알아보지를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다. 영적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잠시 성행하다 사라질 교파의 지도자 정도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행5:36~37)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제자가 된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예언적 다윗’으로 오신 분이라는 것을 올바로 알아보았고, 초림 하셔서 다 이루지 못한 ‘예언적 다윗’의 예언은 재림하셔서 완전히 이루시게 될 것이라는 것도 굳게 믿었다.
그런데, 제자 된 사도들 조차도 ‘예언적 다윗’의 예언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예언적 다윗’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시기’에 대한 문제였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과 사도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유대교에서 개종한 성도들은 하늘로 올리우신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그 시대에 다시 임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 내에서는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서로 유물 상통하는 일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매일 집에 모여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상고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했다(행 2:44~47). 그리고 더 열심있는 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거 하는 전도자로써 삶을 살기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들도 많이 등장했다.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은 ‘종말적 신앙’과 ‘메시아 신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을 구원할 구원자로 완전히 믿고 있었으며 ‘예언적 다윗’으로 오신 분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예수님께서 ‘재림 다윗’으로 다시 사람되어 오실 것이라는 것도 온전히 믿고 있었다.
이런 예루살렘 교회의 사상은 당시 예수님을 ‘예언적 다윗’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유대인들로서는 수용하기 힘든 것이었고, 그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와 전통 유대교 사이에 대립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급기야 대립이 심해지면서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종교로 탄생하게 된다.
[기독교의 역사와 ‘재림 다윗’]
(재림하실 예언의 시대가 도래하기까지) ‘예언적 다윗’에 대한 또 다른 오해.
유대교와 결별한 그리스도교는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의 나라에까지 신속하게 전파되어갔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베드로와 사도들이 앞장을 섰다면 이방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회심한 ‘사도 바울’이 선봉에 섰다. 1차 2차 3차에 이은 전도 여행으로 이방에 많은 나라에까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성도들이 급속히 증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황제가 바뀔 때 마다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대하는 정치적 방식이 달라서 많은 사도들이 정치적 희생양으로 거의 순교를 당하였고 사도 바울도 로마의 황제 ‘네로’가 통치하던 시대인 A.D.64년에 순교를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세상의 핍박과 사도들의 죽음 속에서도 그리스도교의 성장은 멈추지 않았다. AD 70년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고 예수님을 믿지 않아 결국은 십자가에 처형을 시켰던 유대인들이 그들이 자처한 대로 처참하게 죽거나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지는 순간까지도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곧 자신들을 구원하러 ‘재림 예수님’께서 ‘예언적 다윗’으로 오실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며 복음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간절히 기다렸던 예수님의 재림은 그렇게 신속히 이루어질 예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옛적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시고, 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다윗의 왕위’에 앉아 오실 것이라는 예언을 하셨지만 그 예언을 이루시기까지 오랜 기다림을 요구하셨던 것과 같은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지난 역사 속에서 유대인들은 오랜 기다림에 지쳐 ‘구원자’를 기다리지 않고 ‘율법’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탄생할 즈음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유대인들이 ‘예언적 다윗’으로 오시는 구원자를 찾는 일보다는 하나님의 율법 해석에 매달렸던 것을 보면 좀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예언을 믿지 못하고 ‘예언적 다윗’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다.
그렇다면 이런 역사를 하나님께서 성경에 낱낱이 기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 또한 하나님의 예언을 믿지 못해 유대인과 같은 과오를 범하지 말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예언은 비록 더딜지라도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전 3:15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롬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더구나 마지막 시대 등장하시는 ‘예언적 다윗’을 만나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성경은 단언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진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마지막 성령 시대 등장하시는 ‘예언적 다윗’을 반드시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호 3:5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계 5:1~5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더 이상 ‘예언적 다윗’을 찾지 않는 사람들) 기독교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2000년 전 ‘예언적 다윗’에 대한 예언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유대인과 같은 무리들이 오늘 날에도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언적 다윗’에 대한 예언은 인정하되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이미 다 이루셨기 때문에 다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유대인들의 생각과 같이 정확히 틀렸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분명 ‘다윗’의 완전한 예언을 이루기 위해 다시 한 번 더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야 할 것을 거듭 예언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그 예언의 시기가 초대 교회 성도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이루어 질 것이었기에 많은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기는 했으나 그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더구나 저 들은 마지막에 등장하시는 ‘예언적 다윗’을 만나지도 않았으나 자신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자부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유대인들이 ‘예언적 다윗’은 찾지도 않으면서 ‘율법’만 잘 지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다시 오신 ‘재림 다윗’)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이 시대 다윗을 찾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지금 자신들의 신앙생활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구원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방식대로 이루어 주는 것이지 사람들이 굳게 믿기만 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즉 예수님께서 ‘예언적 다윗’으로 이 땅에 두 번 째 오시겠다고 예언하신 데에는 마지막 시대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이 ‘재림’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다시 ‘육체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지 않으시면 어느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참혹한 이 땅에 다시 오시겠다고 예언하셨던 것이다.
히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그럼 예수님께서는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왜 다시 오셔야만 하는가? 실상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진리’를 초림 때 다 알려주셨다. 하지만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 100여년 경부터 예수님께서 알려주고 가신 생명의 진리가 하나하나 변개되기 시작하여 ‘중세 종교 암흑시대’를 지내는 동안 무엇이 진리고 무엇이 거짓인지 아예 분별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악한자(사단)에 의해 완전히 사라져버리게 되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일러주셨던 ‘가라지와 알곡의 예언’과 같이 ‘인자(예수님)’가 잠든 후(육신의 죽음)에 모든 ‘알곡(생명의 진리)’은 사단에 의해 짓밟힌바 되었고 생명에 이를 수 없는 ‘가라지(거짓 진리)’가 세상에 뿌려져 가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 13:24~30, 13:36~43)
(‘예언적 다윗’이 다시 오셔야 하는 이유) ‘생명의 진리’가 ‘거짓 진리’로 변개.
– ‘새 언약의 안식일(토요일)’을 ‘일요일 예배’로 변개.
– 하늘의 죄인들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새 언약의 유월절’을 AD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를 통해 폐지
– 태양신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를 도입해 12월 25일을 지키게 함으로 하나님이 아닌 태양신을 섬기게 함.
– 여 성도들이 예배 때 써야하는 ‘수건 규례’ 폐지.
– 이방 신을 섬기는 도구였던 ‘십자가’를 거룩한 성전에 들여와 섬기게 하여 우상 숭배함.
– 하나님께서 지키라 명하신 3차 7개 절기를 모두 폐지시키고 그 자리를 사람의 계명(사순절, 추수감사절등..)으로 변개시킴 (가라지 복음)
이처럼 예수님께서 초림 하셔서 세워주셨던 ‘생명의 진리와 절기’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160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런 사실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사라지게 되었다. 급기야는 하나님께서 세워주시고 지키라 명하신 ‘생명의 진리’보다 변경된 것이 오히려 더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초림하셨을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켜행하는 것보다 철학과 같은 것을 적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재해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입장에서 더 편한 쪽으로 받아들이고 지켜 행했던 것과 같은 역사의 반복인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토론을 일삼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람의 생각에 의해 더하거나 빼지 말고 주신 그대로 지켜 행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하셨기에 아무리 적은 명령이라 할지라도 더하거나 빼게 되면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막 7: 8~9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 도다
골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계 22:18~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도니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그리고 ‘생명의 진리’가 모두 변개되었다는 것은 ‘구원의 축복’이 주어는 장소인 ‘절기 지키는 시온’도 무너져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시온’이 무너진 상태로 세상의 끝이 온다면 어느 누가 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 아무도 없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마지막 때 이 땅에서 구원받을 백성이 ‘시온’에 ‘어린양’과 함께 서있다고 예언 하셨다(계14:1).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구원받을 자녀들을 구원의 장소인 시온으로 불러모으시기 위해 생명의 진리를 회복할 ‘예언적 다윗’의 예언을 따라 다시 오신다고 하셨던 것이다.
(‘재림 다윗’은 곧 ‘재림 예수님’ ) 이 땅에 두번 째 오신 ‘예언적 다윗’
1948년 5월…
세상은 기적이라고 말하는 ‘이스라엘 독립’(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통해 알려주신 재림의 시기)을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 나라’를 건설한 유대인들은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 모세를 통해 세워주셨던 ‘모세 율법’을 목숨처럼 지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토라’라고 불리는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매일 묵상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토론하는 모임을 정기적으로 갖는 것은 물론 ‘안식일’과 ‘3차 7개로 구성되어있는 연간 절기’까지 모세의 율법에 기준하여 엄격하게 지켜 행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구원해줄 ‘예언적 다윗(메시아)’을 간절히 기다리며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분명 사람의 모습으로 오시겠다고 예언하셨고 그 예언을 따라 2000년 전 사람의 모습으로 임하신 예수님을 사람이라는 이유로 ‘예언적 다윗’이 아니라며 영접하지 않았던 그들은 여전히 완고한 마음과 뻣뻣한 목을 가진 백성들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더 이상의 구원도 바랄 수 없는 자들이다.(요10:33) 더불어 1900년간 세계에 흩어져 유랑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을 기적처럼 독립시키신 하나님의 뜻이 ‘재림 다윗’이 오시는 시기를 세상에 선포하기 위한 하나님의 행보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채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그럼 유대인들만 ‘예언적 다윗’에 대한 예언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에 그리스도인이라 자칭하는 ‘기독교’는 과연 ‘예언적 다윗’에 대하여 올바로 이해하고 있을까?
‘다윗’의 예언은 하나님께서 육체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실 구원의 예언이다. 영으로 역사하시는 예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아는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지만 ‘예언적 다윗’으로 오신 분이라는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초림 때 다 이루지 못하신 ‘예언적 다윗’의 예언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 그냥 이루지 않은 상태로 세상의 끝(최후의 심판)이 와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이루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해 ‘구원자(예언적 다윗)’를 포기한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단 한 말씀도 허투루 하시는 말씀이 없고, 이루어지지 않고 미제로 남을 예언도 없기 때문이다.
사46:10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예언적 다윗’의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 져야 할 예언이다. 그 말씀은 곧 마지막 시대에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에 반드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재림 다윗’이 계셔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재림 다윗’을 찾으라 ) 마지막 시대 구원의 조건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통해 1948년에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을 예언하셨던 예수님.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예수님을 ‘예언적 다윗’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다시 오리라 예언하신 1948년에
‘예언적 다윗’의 남은 예언을 이루기 위해 ‘30세‘의 나이로 영적 기름부음인 ‘침례’를 받으시고
다윗의 남은 왕위 기간인 ‘37년의 복음 생애’ 동안
사단에 의해 사라진 ‘하나님의 절기’를 완전히 회복해 주셔서
절기 지키는 ‘영적 시온’을 다시 재건(시87:5)해 주시고
‘영적 시온’ 으로 당신의 양떼를 불러 모으시는 그 분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분이 바로 마지막 시대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자로 등장하신 ‘재림 다윗’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예언적 다윗’을 영접한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역사이다. 그래서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구원 받을 자들도 ‘예언적 다윗’을 올바로 알아보고 영접한 사람들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온전한 예언을 이루기 위해 모세때로부터 재림하시는 1948년까지 3500년이라는 긴 인내의 시간을 ‘다윗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셨으나 그 예언을 끝까지 믿고 붙잡았던 자들에게는 반드시 ‘구원’으로써 갚아주셨다.
그리고 오늘날 예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이시대 다시 오신 ‘재림 다윗’을 찾는 일보다 마지막 심판주로 오시는 하나님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십자가에 자신들의 구원자를 못박았던 유대인들과 다를바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일 것이다. 유대인들과 같이 하늘만 바라보다가는 ‘구원주’가 아닌 ‘심판주’로 임하시는 하나님만 뵙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이제라도 하늘 구름만 바라 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예언적 다윗’의 모든 예언을 이루신 분이 혹 자신의 주위에 계시지는 않은지 영적 영안을 가지고 찾아보는 지혜를 가지는 자가 되자.